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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시를 읽은 게 언제였더라?

친구에게 소개받은 분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서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 만나기 전에 읽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기도 하고.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시를 읽었을까?

 

바다는 잘 있습니다 / 이병률

 

 

너무 깊게 파고 들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떤 시는 가슴을 너무 깊게 파고 들어 마음이 먹먹해지곤 한다. 내게는 23p에 있는 「있지」라는 시가 그랬다.

 

있지

있지

가만히 서랍에서 꺼내는 말
벗어 던진 옷 같은 말

있지

문득 던지는 말
던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므로 도착하지도 않는 말

있지

더없이 있자 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음이 그렇고 그런 말

있지

전기 설비를 마친 새 집에 등을 켤 때
있지, 라는 소리와 함께 켜지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도 되는
하지만 들어도 들어도 저울에 올릴 수 없는 말

있지

그러다가도 그러다가도 혼자가 아닌 말
침묵 사이에 있다가도
말 사이에 있다가도
덩그마니 혼자이기만 한 말

있지

수상하고 수상하도록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무엇으로 청천벽력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것인지
포개고 자꾸 포개지는
순박한 그 말에는 참 모두가 있지

- 김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23p -

 

 

습관이 이별을 뒤쫓다

 

내 삶에 '있지'는 얼마나 가득했을까.

 

말을 걸면서 '있지',

들으면서 '있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있지',

슬픈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있지',

전화하며 '있지',

이야기를 듣다가 내 생각을 잠깐 더하고 싶을 때 '있지'

 

그러다보니, 이병률 시인처럼 놀랄 수밖에 없다.

 

있지, 라는 소리와 함께 켜지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도 되는

 

이제 '있지'라고 말할 대상이 없는데, 

나도 몰래 '있지'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아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직도 그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아서.

 

그 관성은 때로

지구보다 묵직하다.

 

 

 

 

 

치유에는 슬픔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며 편해지는 것은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며 불편해지는 것은

슬퍼하는 법을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슬퍼하는 방법을 적은 설명서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리고 그 설명서를 잃어버렸던 사실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단단해진 마음의 외피를

망치와 정을 들고 내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때때로 마음 속 물이 되어

스며드는 것이 있다

 

시인의 말이 그렇다.

 

슬픔의 순간, 마음에 새살이

톳아나는 것을 느낀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 교보문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의 산문집을 발표하며 여행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시인 이병률의 다섯 번째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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